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 (문단 편집) === 현대의 평가 === 현재 역사학계 주류는 동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 전통과 새로 도입한 기독교를 잘 조화했고,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폄하할 이유가 전혀 없는 당대의 주요 국가로 본다.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과 그리스도교 문명의 강고한 방파제 노릇을 수행한 것'''은 동로마 제국이 역사에 남긴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중동의 여러 지역들에서 기독교가 모조리 사그라들고 대부분 이슬람화된 것을 볼 때, 동로마 제국은 유럽 기독교 문명의 보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만일 동로마 제국이 없었다면, 할리드 이븐 왈 알리드와 같은 명장들이 이끌던 정통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군은 아나톨리아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동유럽 지역, 그리고 나아가 서유럽에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스페인 지역을 약 300년 동안 통치했던 [[서고트 왕국]]도 이슬람 제국 군대의 약탈전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동로마가 서유럽에 전달해준 것은 많다. 대표적으로 수도자 생활,[* 성 안토니오와 성 파코미오가 이집트인이다.] 미술 양식 등이 있다. 물론 동방이 일방적으로 서방에 선물만 준 것은 아니다. 가령 [[반달리즘]]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반달족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전쟁이 이탈리아에 훨씬 파괴적이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또한, 동로마 제국은 동방정교의 총본산으로서 동유럽 문화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장 러시아의 [[성 바실리 대성당]]만 해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라 칭할 만큼 동로마와 역사・종교・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서유럽 역시 각 지역의 수도원과 교회가 문명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고전 문화 보전 및 발전에 힘썼다. 애당초부터 발전했던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머지 서유럽 지역도 카롤링거 르네상스 등을 거치며 문명이 발전하였다. 중세 이슬람 역시 동로마 문명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아랍인들은 원래는 동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야만인, 즉 오랑캐라 멸시당하던 유목민들 이었으나 6~7세기의 폭발적인 확장 이후 적극적으로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화를 수용하여 이 둘을 적절히 조합해 찬란한 중세 이슬람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베네치아]]부터가 동로마 제국령 도시에서 독립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베네치아의 초기 건축물은 동로마 양식에서 가져온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다. 대표적인 건물이 [[산 마르코 대성당]]인데, 이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기아 소피아]] 다음가는 교회인 성 사도 성당을 모방해서 건축하고 동로마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도배했으며 몇몇 유물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해와 장식하기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